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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노동에 복무하는 여성들

이선영
미술평론가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전은 30대 초반의 미혼 여성인 작가의 사회적 자의식이 묻어나는 전시이다. 여기에는 편재하는 가부장문화 아래, 억압되고 생산되는 여성의 무의식과 욕망이 꿈틀거린다. 적지않은 여성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에 대한 해석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제외시키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박성연은 이 문제를 자신의 작품 전면에 드러낸다. 그것은 흔히들 오해되 듯, 과대망상적 피해의식에 의해 편향성이 아니라,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파고들면서 보편적인 지평을 획득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예술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훌륭한 전략이라고 생각된다. 박성연의 작품의 논리적 고리들을 따라가 보면, 불평등이라는 정의롭지 못한 관례가 비단 여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날선 문제의식이 존재하지만, 거창한 모토에 가려진 빈약한 상상력 및 형식적 완결도의 부족, 투쟁을 위한 투쟁에 머무는 것을 넘어선다. 또한 주류 문화에 성공적으로 편입하기 위한 방편으로 내세울 뿐인 위선적 페미니즘과도 다르다.

박성연은 지고한 예술적 별천지에 자신의 진지를 구축하기 보다는, 공기처럼 여성을 에워싸고 있는 일상의 불온한 공기와 뒤섞이면서 그 내부로부터 투쟁하려 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한국에서 예식장이나 러브 호텔로 전용되는 키치화된 궁전들, 여직원 유니폼, 화장품 광고지 등 극히 흔해 빠진 것들이다. 흔하고 일상적인만큼, 그 이면을 뒤집어 보기는 쉽지가 않다. 여기에는 다소 거창해 보일만큼의 사회적 비전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 전시는 넓지 않은 전시 공간에서 많지 않은 작품으로, 공적/사적 영역의 여성, 여성의 몸과 정신에 가해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관객으로 하여금 그 사이의 논리적 연결고리들을 찾도록 한다. 물론 모든 근본적인 문제들이 그러하듯, 딱 떨어지는 결론은 없다. 예술은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명료한 대답이 아니라, 껄끄러운 문제제기를 통해 대답으로 가는 길을 단축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이 전시는 크게 세가지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보이는 것은, 안내 데스크와 그 맞은 편에 비디오 버전으로 나타나는 작품으로, 늘 상냥하고 상큼한 목소리로 고객을 맞이하는 용모 단정한 여성의 이미지다. 작품 [“i ”]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는 대사와 함께 자동인형같은 기계적인 동작을 되풀이하는 ‘직업여성’의 이미지이다. 전시장의 안내 데스크를 활용한 설치와 비디오 속 도우미 여성은 사회적 분업에서 주역이 아닌, 보조자의 역할을 맡는 여성의 전형적인 상황을 대변한다. 노란색 글자 i가 끊임없이 인사하는 비디오 작품은 ‘information’이라는 단어에 단적으로 표현된 도구적 역할로서의 여성주체 ‘I’인 것이다. 그것은 여성의 공적 노동에 나타난 주변성을 풍자한다. 이 전시에서 공적 영역과 대조되는 사적 영역의 본보기가 웨딩홀로 은유된 가정이다. 작품 [녹아 흘러내리는 웨딩홀, 녹아 흘러내리는 궁전]은 장엄한 클래식 음악을 배경으로 근사하게 등장했다가 끝없이 허물어진다. 이 작품에 나오는 성은 국내의 예식장 건물, 웹 싸이트에서 찾은 외국의 궁전사진 등에서 소스를 취해 포토샵으로 작업한 것인데, 모두 흑백으로 처리해서 원본과 가짜의 구별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왕자님과 백년가약을 맺는 동화 속 공주의 꿈이 이루어질 멋드러진 궁전은 표피와 알맹이가 서로 겉도는 싸구려 키치이고, 가부장적 위계질서로 인해 숨막히는 장소이다. 신비함과 신성함으로 포장되곤 하는 이 성소는 여성에게는 불편하고 때로는 기괴한(uncanny) 곳이다. 박성연은 커진 몸뚱아리 때문에 좁은 공간에 갖힌 앨리스를 렌티큘러로 만든 [꿈틀거리는 앨리스](2004)와 마그리트가 그린 거대한 초현실주의적 사과를 설치작품으로 변주한 [숨쉬는 사과](2004)에서도 폐소공포증적 강박관념을 표현한 바 있다. 이전의 작품들이 모호한 은유로 에둘러 가고자 했다면, 이번 전시는 여성의 불만을 보다 직접적으로 발언한다. 2004년 브레인 팩토리에서 열린 [Night, Night, SweAt Dream!]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여성의 분노를 괴기스러운 히스테리로 표현했다. 2D에서 3D효과가 구현되는 둥근 렌티큘러(lenticular) 안에 갇힌 채 영원히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여성들은 이 전시에서 안내 도우미로 다시 표현되고 있으며, 악몽에 시달리는 여성의 처지는 무너지는 성으로 재연된다. [국수뱉는 여자](2004)에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 점철된 언어로는 불가능하기에 말대신 국수를 쏟아내는 입은, 끊임없이 아름다워지라는 메시지를 쏟아내는 지배 문화의 몸통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저항이 무의식적으로 투사되는 육신의 언어에서 보다 의식적으로 문제의 핵심에 다가가고자 하는 것이다. 공적/사적 영역 사이의 공간에서는 화장품의 매뉴얼에서 모티브를 얻은 작품으로, 여성의 몸과 마음에 집중적으로 투하되는 아름다움에 대한 신화를 다룬다. 풋풋함과 신선함을 상징하는 듯한 녹색 계열의 벽면 공간 가득히 울려퍼지듯 쓰여진 광고성 문구들--‘시간의 흔적을 지워주는’, ‘더 젊게’, ‘타임 릴리즈 시스템’, ‘비단같은’ 등등--과 화장품 설명지를 모아 액자에 담은 작품, 화장품 광고 매뉴얼로 만든 책자 등이 놓여있다. 검정색의 무게감 있는 표지의 책자는 마치 백과사전이나 성서같이 보이는데, 화장품 광고물이 ABC 순서대로 400페이지가 넘게 편집되어 있다. 유혹과 설득의 어조를 가지고 우리 주변에 넘쳐나는 메시지들과 사회에 법전이나 성전처럼 통용되는 보편화된 기준은 사실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에 대한 엉뚱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풀타임으로 고용된 일반 여성 노동자의 연간 평균 수입은 남성과 큰 차이를 보인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젠더]에서 임금노동이 확대되고 일반화됨에 따라 노동에서 여성에 대한 경제적 차별은 더욱 증가했다고 말한다. ‘진보’라는 것은 더 많은 여성이 저소득 임금노동에 참여하는 것일 뿐이다. 여성의 노동 참여율은 여전히 낮고, 그중에서도 박성연의 작품에서 안내 도우미로 전형화된 부차적인 직업에 일하는 비율은 높다. 또한 사적 영역, 요컨대 직업을 갖지 않은 여성들이 가정에서 수행해야 하는 무보수 노동 역시 여성의 경제적 차별과 종속을 지속시킨다. 여성의 상황을 표현함에 있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극적인 면모가 있는 박성연의 작품은 공적/사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노동의 성적 분화라는 쓰라린 진실을 깔고 있다. 그러나 박성연의 작품에서 화장품 전단지로 표현되는 지배적인 문화산업이 행하는 것이 바로 성별분업을 낭만적으로 포장하는 일이다. 재크린 살스비(J. Sarsby)는 거의 보편적인 전범이 되고 있는 서구의 로맨스 소설들을 분석한 결과, 여주인공이 처녀이면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관을 모시고 있는 꼴이되고, 그녀가 결혼을 하면 남편은 얻게 되지만 직업은 잃는다고 요약한 바 있다.

결국 사회적 분화가 성적 차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이반 일리치는 sex라는 단어는 분리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 sexus에서 유래했다고 지적하면서, 섹스화하는 체계로의 사회의 산업적 변형을 거치면서 인간의 노동력, 리비도(생명력), 특성 혹은 지성을 양극화시킨다고 말한다. 상품의 생산과 교환이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 즉 현대로 들어오면서 양극화는 계급적 의미를 띄게 된다. 인간의 자유가 소유라는 말과 동일시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은 비경제적이고 자급자족에 바탕을 둔 젠더를 제거하고, 사회적인 섹스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근대 경제는 인간의 욕구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희소성으로 향하게 한다. 박성연의 작품에서 두터운 성전과 찌라시를 통해 유포되는 미인의 기준은 자본주의 체제가 전략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희소한 가치 중의 하나이다. 오늘날 미의 기준이 된 작은 얼굴과 흰 피부, 막대기같은 몸매는 애초부터 획득, 유지되기가 힘들다. 그것은 공적 영역의 주인공인 남성은 물적 자본을, 사적 영역의 주인공인 여성은 육체적 자본을 쟁취해야 함을 은연 중에 강조한다. 그 한켠에서 여성이 돌아가야할 진정한 장소라고 간주된 가정은 무너지고 있다. 이 전시의 맥락에서 그 원인을 살펴보자면, 그곳은 공적 영역에 나타난 바와 같은 여성의 그림자 노동이 본격적으로 수행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경제가 통계적으로 보고된 부분과 보고되지 않은 부분으로 구분된다고 지적한다. 경제가 드리운 그림자, 즉 새도우 워크(shadow work)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경제활동이다. 현물이전의 경제, 비화폐 시장. 셀프 서비스, 자조 자발적 활동의 영역, 사회적 재생산 등으로 불리우는 그림자 노동는 한 상품에 가치를 더해주기 위해 소비자가 행하는 무보수 노동이다. 페미니즘 이론가인 줄리엇 미첼(J. Mitchel)도 남녀의 역할분화는 단순히 노동상의 분업이 아니라, 한쪽의 역할을 써비스로 격하시키고, 다른 한쪽의 일을 생산으로 격상시켜 놓는데 있다고 보았다. 여성은 가정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로서, 가정을 기반으로 하는 생산을 위해 숨겨진 노동력을 제공하며, 또 한편으로 후기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고도로 발달된 이데올로기의 대상이다.

가사노동은 고된 일이면서 하찮은 것이라고 평가된다. 가정의 경제적 기능은 일정한 생산노동력을 준비, 확보하고 대량소비를 위한 장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가정은 자본주의가 그 유지를 필요로 하지만, 실제로는 파괴하는 것중의 하나이다. 전형적인 가정주부의 일은 현대에 유통되는 모든 화폐가치에 내포되어 있으되 측정할 길이 없는 지하경제의 일부이다. 이반 일리치는 자본주의와 함께 널리 확산된 임금노동의 이면에서 혹은 그와 병행해서 제 2의 무보수 노동이 등장하였다고 지적한다. 자본은 그림자 노동을 통해 사회적  재생산을 위해 지불하는 비용을 최소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재화와 용역의 생산과는 달리, 그림자 노동은 상품의 소비자 자신 특히 소비적인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림자 노동의 수준이 어느정도이든 상품으로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할 때 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활동이다. 그것은 임금노동으로 생산된 것의 가치를 무보수로 높여주는 일이다.

박성연의 작품은 흐물거리며 뭉개지는 성곽이나, 거대한 장치의 부속처럼 까딱거리고 있는 여성, 심지어는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몸에 투자해야 하는 소비활동에 이르기까지, 그림자 노동은 어김없이 여성의 몫이 되어버린 현실을 강조한다. 여성들은 한층 더 불평등한 조건으로 임금노동이 출현하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일거리에 매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그림자 노동은 스스로 돕는 일(자조)로 간주되어 그냥 스쳐지나가는 많은 일들에 묻혀있다. 그러나 그림자 노동은 여성 쪽에서만 겪는 일인가? 자본주의는 점차 많은 일들을 그림자 노동으로 만들어간다. 가사노동을 비롯, 출산, 교육, 육아, 재교육 등,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사적 영역으로 편입시킨다. 직업 때문에 무보수 노고로 행해지는 일, 자신을 자본화시켜야 하는 모든 일이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은 취약한 계층들을 고립된 영역에서 환산될 수 없는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과 유사한 입장에 빠지게 한다. 예술 또한 그러하다. 오늘날 예술은 좋은 의미에서든 아니든 여성화 되고있다. 그 와중에서 실질적으로 권력이 집중되는 자리는 소수의 남성들이 차지하더라도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욕구가 재화의 소비에 의해 만족된다. 모든 영역에서 시장의 힘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의 아름다움과 젊음의 유지 또한 상품소비를 통해 이루어진다. 여성의 젊음과 아름다움이 공적영역이든 사적영역이든 여성의 가치의 기준이 된다면, 여성들은 이 소비 노동에 적극 참여할 수 밖에 없다. 박성연의 작품에서 여성들은 자신의 교환가치를 높이기 위해 화장품을 비롯한 상품들을 소비하도록 촉구된다. 그렇게 자신을 상품화시키고 경쟁력을 높여 그녀들이 쟁취하거나 귀속될 공적, 사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자리는 빈약하고 불안하기 그지없다.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수행되는 여성의 그림자 노동은 사회가 만들어낸 허구적 거울 앞에서 그녀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들고, 사회적 통제의 그물망에 계속 가두어 놓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