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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연의 렌티큘러 (lenticular) - 시각적 코라(khora)의 균열된 틈 사이에서 맴돌기

권영진 (미술사)

 


박성연은 ‘본다’는 것에 관심이 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시각예술인 미술을 전공한 작가로서 ‘본다’는 것에 예민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본다’는 것에 대한 박성연의 관심은 우리의 눈으로 이루어지는 시각적 인식의 메커니즘에 대한 의문에서부터 출발하여, 시각적 인식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우리의 자아 인식과 정체성 형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구획된 일련의 틀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성적 계몽의 시대인 르네상스 이래로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동일시되고, 태양 아래에서 시각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곧 지적으로 ‘알 수 있다’는 의미로 통용되었다. 20세기 후반 많은 철학자들이 서구 철학의 역사를 ‘빛의 철학(photology)’으로 규명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이성에 의거한 합리적인 사유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나아가 그러한 이성중심주의는 곧 시각중심주의와 의미가 교환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 세기말 이래 철학적 , 문화적 관심은 근대 시각문화의 중심에 위치하는 빛의 계몽을 통한 이성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 관념철학의 이상화된 신화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알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시각적으로 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시화된다. 수세기 동안 우리를 지배해온 이성적 관념철학의 역사는 이성적 사유의 주체인 인간(Man)이 “계몽의 빛”, 태양으로 회귀하는 과정이었으며, 여기서 인간은 인간의 육체적 신체를 환기시키는 여성적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 사유를 대변하는 남성적 주체로 한정된다.

백색의 빛 속에서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육체의 물질적 한계를 삭제한 남성 , 인간의 이성적 정신이라는 관념적 주체의식을 만들어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존재는 이성적인 사유의 과정을 통해서 확인되는 것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밝은 계몽의 빛, 즉 이성적으로 인식되는 ‘시각작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흐름 속에서 ‘본다’는 것은 곧 지식 체계의 형성에 대한 은유가 되며, 시각적 인식을 통한 지적 사유는 곧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빛의 철학, 이성의 역사는 곧 여성의 몸이 대변하는 물리적 신체성을 대립항으로 하여 남성적 사유와 이성적 관념론에 대한 승리를 지지하고 승인하는 과정이었다.

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이처럼 시각은 인간의 다른 어떤 감각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인간의 이성적 사유의 능력을 대변하는 시각체계는 단일시점 원근법으로 재현되었다. 원근법은 외부 세계의 모든 것을 구체적인 하나의 실체로서 확인하고자 하는 절대 이성의 힘을 드러낸 것이며, 그것을 통해 시각 주체의 지배적인 정체성을 구현하는 과정이 된다. 인간 이성의 역사를 대변하는 르네상스적인 각성은 미술에 있어 ‘이성의 단안(單眼)’으로 조준되고 계량된 형태를 캔버스 위에 재현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단일 시점 원근법의 원리는 카메라 옵스큐라의 기계적 고안에 의해서 더욱더 과학적인 형태로 구체화 되었다.

데생을 할 때 사물의 형태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감았던 한쪽 눈을 뜨는 순간 , 우리는 곧 우리가 정확하게 올바르게 보았다고 믿었던 것의 허상에 당황하게 된다. 우리는 한쪽 눈으로 측량한 형태를 정확한 것으로 믿고, 한쪽 눈의 카메라 렌즈가 구획해주는 시각 체계를 사물의 궁극적인 실체로서 우리의 뇌 속에 주입시킨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기관인 ‘몸’과 ‘눈’을 거기에 맞춰서 훈육하고 규율하는 것이다.

박성연의 작업은 오랫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이러한 시각체계에 대한 딴지걸기에서부터 시작된다 . 시각매체로 작업하는 작가로서 누구보다도 ‘본다’는 것에 예민하지 않을 수 없는 박성연은 눈을 통해서 인식하는 현실과 그러한 눈을 통해서 판단하는 비현실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 외곽의 집에서 버스를 타고 진입하는 서울의 도시 광경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거울 속에서 본 세계처럼 친숙하지만 낯설다. 카메라를 들고 포착해 낸 도시의 거리는 마그리트의 수수께끼 그림처럼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박성연의 작업은 시각적인 욕망과 충족감, 그리고 그것이 주는 낯설면서도 친숙한 체험에 대한 접근에서부터 시작된다.

르네상스 이래 수세기 동안 인간을 지배해온 시각적 인식체계와 이성적 사유의 역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박성연의 작업은 ‘본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와 그것이 구축하는 사유체계, 그리고 그 안에서 작업하는 시각예술가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스캔한 이미지와 도로반사경의 왜곡된 이미지는 우리가 정확하게 보았다고 믿어온 것과 옳다고 믿어 온 것에 대한 의문과 회의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박성연은 정확하게 보아야 하며 , 정확하게 재현해야하는 시각예술가로서, 또한 정확하게 생활하고, 정확하게 기능해야 하는 현대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고 있는 듯 하다. 거울에서 반사되어 온 이미지가 항상 그러한 의문을 제기하는 기점이 되어왔다면, 이번에 시도하고 있는 렌티큘러(lenticular) 이미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묻고, 눈으로 본 것을 정확한 것으로 인식하는 우리의 시각적 인식체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매우 적합한 수단이 된다.

평소 카메라를 즐겨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 , 단안(單眼)으로 재현된 정확한 현실의 이미지가 오히려 낯선 체험을 가져왔다면, 두 눈으로 외부세계를 ‘보는’ 우리의 두 눈의 간격, 그 시차(視差)를 이용한 렌티큘러 이미지는 우리의 시각적 인식체계의 허점을 드러내기 위한 매체로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두 눈으로 외부세계를 보고, 두 눈의 시차(視差)가 제공하는 깊이감과 입체감에 대한 정보와 함께 그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체계는 단안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구획된 과학적 이미지에 대한 신뢰로 침윤되어 있다.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는 그러한 단일시점 원근법의 시각체계에 대한 교정을 요구한다 . 수세기 동안 우리의 시각적 인식체계를 지배해 온 단일시점 원근법은 단일성과 유일성을 의미하고, 그것은 다시 불변성과 통일성으로 귀착된다. 인간은 빛과 이성의 존재이며, 근대적 인간의 시각중심주의적 사고는 우리의 인식체계를 확고하게 지배해 왔다. ‘빛’을 통한 ‘시각’의 인식은 근대적 인간주체의 이성중심주의, 태양중심주의로 이어지고 그것을 통해 관념철학의 전통이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그러한 과정에서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몸의 물질적 가변성은 배제된다. 빛과 이성중심주의의 역사에서 알 수 없는, 즉 볼 수 없는 영역은 빛으로 밝혀지지 않으면 삭제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박성연의 작업은 본다는 것은 곧 인식하는 것이며 , 그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연속과정에 대한 단절이며, 균열이다.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 앞에서 관람자는 위치를 옮길 때 마다 달라지는 영상에서 기묘한 시각적 교란을 체험하고, 그것은 곧 평상시 믿어오던 확신에 대한 혼란으로 이어진다. 수용자의 시점과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렌티큘러 이미지는 단일한 사진 이미지와 주어지는 시각적인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비디오 이미지에 비해, 이것과 저것을 오가는 체험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곧 단일시점 원근법에 대한 지속적인 교란인 셈이다. 기존의 이미지가 우리의 두 눈의 존재를 거부하며, 두 눈으로 하나 보기를 가장했다면,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는 우리의 두 눈의 실체를 확인시키는 작업이다. 그것은 두 눈으로 여럿을 보는 과정이다.

렌티큘러는 반원통 형태의 렌즈들이 배열된 렌즈 시트에 길게 잘려진 이미지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하여 여러 개의 이미지를 순차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원리로 제작된다 . 그것은 바로 인간의 두 눈의 존재에서 착안한 것으로 사진의 원리가 갖는 맹점을 스스로 보완하는 하나의 해법이기도 하다. 인간은 두 눈을 갖고 있으며, 두 눈으로 입수한 시각적 정보를 하나의 데이터로 가공하여 뇌 속에 전달하는 과정으로 외부세계를 인지하다. 렌티큘러는 우리가 정확한 것으로 믿고 있고, 보고 있는 시각적 정보의 맹점을 역이용하는 것이다.

렌티큘러는 하나의 면에 여러 개의 사진을 균일하게 잘라 재배열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 하나이면서 여럿인 이미지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과 교차하는 비현실이면서, 비현실이기에는 현실에 근거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단일한 평면 위의 연속동작이며, 정지된 화면  위의 동영상이라는 렌티큘러 기법을 통해 박성연은 현실 속의 꿈, 꿈속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들은 거듭하여 국수를 뱉어내는 여자의 모습,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남자의 모습 등 강박적인 이미지들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여자는 국수를 다 뱉어 낼 수도 없고, 남자는 물에 빠지지도 헤엄쳐 나오지도 못한다. 그저 시지프스처럼 반복하여 지속할 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 , 우리가 본 것으로 구축해온 이미지가 발휘하는 힘은 정지되어 있지도 않으면서, 흘러가지도 않는 답답증으로 반복되는 박성연의 렌티큘러 이미지 앞에서 무력해진다. 이것과 저것, 꿈과 현실을 오가는 박성연의 이미지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꿈속의 이미지처럼 낯설고 잊어버리기에는 너무도 선명한 이미지로 반복된다. 강요된 현실과 구축된 지식, 그것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낯설고 기이한 재확인의 과정이 박성연의 렌티큘러 작업이다. 

서구 관념철학 , 빛의 철학의 시조격인 플라톤은 이성적 언어작용으로 규명할 수 없는 잉여의 부분을 코라(khora)로 지칭하고 있다. 이성중심주의의 역사에 반기를 든 많은 철학자들이 코라에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코라란 로고스의 논리를 거부하면서, 즉 지적으로 알 수 없고 감각으로 인지할 수도 없으면서 로고스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박성연의 작업은 분명하게 보이고, 그렇게 보인다고 믿고 있는 우리의 시각적 사유에 대한 끊임없는 불일치의 과정을 노출하는 것이다. 마치 빛과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잉여의 부분으로 남겨진 코라(khora)처럼, 그것은 우리의 시각 작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이성적, 논리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밖의 세계, 비현실적인 꿈속의 세계처럼 거듭하여 반복될 뿐이다.